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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는 아메리칸 스타일

     손녀는 아메리칸 스타일

                                            남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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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할머니 때문에 정말 못살겠어요, 저는 할머니가 너무 싫어요. 이거 비밀인데요....”

 또 손가락을 걸고 들어보니 할머니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면서 할머니를 다른 데로 보내자고 하는 게 아닌가. 아무리 아메리칸 스타일이라 하더라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이 녀석이 할머니를 하찮게 여긴다면, 이참에 생각을 바꿔줘야지 마음먹고 짐짓 정색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사실은 말이야, 우리가 사는 아파트의 진짜 주인은 할머니란다. 장롱도 냉장고도 신발장도 모두 할머니 꺼야. 할아버지도 겨우 붙어사는 처지란다.”

“그럼 할머니가 우리 집에서 1번이에요?”

“그렇다니까.”

“그럼 2번은요?”

 이렇게 기회가 왔을 때 이 할아비 서열도 윗자리에 못 박아두고 싶었다.

“2번은 당연히 할아버지지.”

“그럼 엄마가 3번이겠네!”

“아니야 삼촌이 3번.”

 이 녀석이 가볍게 여기는 삼촌의 순서를 일부러 몇 단계 올렸다.

그다음부터는 하린이가 읊어대는 대로 맞다고 해주었다.

 그래서 엄마가 4번, 아빠가 5번, 하린이가 6번, 동생 하윤이가 7번으로 차례가 정해졌다. 이 순서대로라면 오늘 6번이 1번을 몰아내려고 했으니 이만저만한 반역이 아니다. 그날 이후 아이의 머릿속 그림이 좀 바뀐 듯 보였다. 잔소리쟁이 할머니가 숙제하라고 성화를 부릴 때도 “예 할머니! 예 할머니!” 하는 모양새가 조금은 공손해 보였다. 요즘 와서는 김치나 삼겹살도 잘 먹으면서, 우리네 덕담까지도 제법 잘 할 줄 안다.

 “할머니가 우리 위해 애쓰시는 것 다 알아요.”

------하략------

(김포문학 37호, 345~346 페이지, 2020)

 

[작가소개]

남명모  김포문인협회 회원, 김포문인협회 이사 역임, 『수필 춘추』등단(2002). 김포문학상 우수상(2007), 제1회 테마편지쓰기 대회 우정 사업본부장상(2011), 경기도문학상 공로상(2014)수상.

 

[시향]

 위 글은 <손녀는 아메리칸 스타일>이란 남명모 수필가의 수필에서 발췌한 일부분이다 미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치원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아침마다 할아버지 손을 잡고 등교하던 어느 날의 에피소드다 이미 아메리칸 스타일의 사고방식이 머릿속에 꽉 찬 손녀 하린이는 숙제하라고 자주 채근하는 할머니가 싫어졌다 평소 자기편이라고 생각되는 할아버지에게 못마땅한 할머니를 일러바치는 장면이 읽을수록 재미있고 여운을 남긴다 어른들 심기부터 살피며, 같은 말이라도 에둘러 표현하도록 은연중에 교육받는 한국 아이들에게서는 좀체 보기 드문 솔직함이 있다 그러나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했던가! 할아버지 몇 마디 말씀에 한국의 위계질서와 예절을 곧바로 익혀가는 모습이 대견하고 사랑스럽다 미국에 두고 온 유치원 친구들과 수평적 관계를 갖다가, 한국으로 온 후 규칙적이고 수직적 인간관계를 체득해 나가며 겪는 어린 소녀의 정신적 혼란을 살짝 엿보게 되어 흥미롭고 신선하다

글 : 박정인(시인)

남명모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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