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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압록, 강이로소이다

          나는 압록, 강이로소이다

                                                 박종규

 

------상략------

 

흐르는 것에는 궤적이 있다

역사는 시간의 궤적이나 내게는 궤적이 없다

나는 모든 것을 품어서 흘려보낼 뿐

 

------중략------

 

수평은 모자람을 채움이다

슬픔을 기쁨으로, 풍요와 부족함의 높낮이를

고루 맞추는 것이다

수평은 내 존재 이유다

 

다툼은 오히려 인간들에게서 왔다

늘 그들 다툼의 경계에 선 나는

한반도, 중국, 만주의 요충지였고

러일전쟁, 한국전쟁 때는

수많은 병사의 추깃물로 넘쳐났다

 

------중략------

 

물 울타리 건너편 불빛 찬란한데

밤을 밝히지 않는 어둠의 촌락들...

저녁이 되어도 굴뚝에 연기가 없는

파란 하늘 아래 잿빛 마을 사람들!

 

끝없는 굶주림과 노역,

아이들의 잃어버린 표정까지도

일족의 안위를 담보로 삶이 억류당하는

아, 어이할까나, 이 희대의 비극을!

 

사람들이 굶어 죽어나간다

건너편에는 흰 밥에 고기 있어

굶어 죽느니 그 목숨 걸어,

나를 건너고 또 건넌다

 

 

그래 차라리, 차라리 내 배를 밟고 건너라!// 탕 탕 탕!

 

오! 비명도 못 지르고 붉은 상처로 가라앉아

내 가슴에 안겨들며 생사를 묻고, 또 묻는다

그래, 나는 어쩌란 말인가, 내가 어쩌란 말이냐!?

 

나는 안다

물살에 섞여드는 이 소리도

내 흐름 거슬리지 못하고 유유히 흘러가

결국은 숨은 여로 수장되고 말 것임을!

 

이제까지는 없었던 시간이 내게 머물고 있다

비로소 나도 하나의 궤적을 가지는 것이다

 

흐르는 것을 거스르지 마라/ 흐르는 것은 흐르게 하라

먼 훗날 이 모든 아픔 하늘바라기 되더라도

그 깊은 궤적, 수평으로 메울 수 있으리니.

 

[작가소개]

박종규 서울대학교 졸업. 김포문학상, 경기도문학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사상과 문학상 대상, 영호남수필문학상 대상, 아시아 황금사자문학상 수상, 마포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주앙마잘』,『파란비 1~2』,『해리』.에세이집『바다칸타타』『꽃섬』. 소설집『그날』.

제1회 북미도서전 위탁도서에 선정(해리/꽃섬), 2007~2020 14년간 75회 차 퍼포먼스 진행 중. KBS 일요초대석, KTV, 국 TV 출연. 세종도서 심사위원 추천위원. 한국교수 작가회 부회장

 

[시향]

박종규 소설가의 이 시는 압록강물의 길이에 대비되는 장시로, 강물이 시의 화자다

나는 모든 것을 품어서 흘려보낼 뿐, 나에겐 궤적이 없다 수평이 내 존재 이유이기에 묵묵히 흐를 뿐이다 나는 주변국의 요충지였고, 러일전쟁과 한국전쟁 때는 병사들의 추깃물로 넘쳤다 그럼에도 지금 나는 다시 수평을 이루어 흐르고 있다 나는 통곡의 마을과 웃음소리 넘치는 마을을 갈라 흐른다 같은 푸른 하늘 아래, 한 쪽은 불빛 찬란한데 다른 한 쪽은 밤에도 불 밝히지 못하고 굴뚝에 연기마저 나지 않는 잿빛이다 한 일족의 안위를 담보로 억류당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굶어 죽어나간다 흰 밥에 고기가 있는 강 건너 마을로 목숨 걸고 가야만 하는 사람들이 나를 건너고 또 건넌다 총소리가 나고, 비명도 못 지르고 피를 흘리며 가라앉아 자신의 생사를 내게 묻는다 “그래, 나는 어쩌란 말인가, 내가 어쩌란 말이냐!?” 나의 이 부르짖음도 수장되고 말 것임을 나는 안다 비로소 내게도 하나의 궤적이 생겼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나면 그 깊은 궤적도 메워지고 다시 수평을 이루며 유유히 흐를 것이니,「나는 압록, 강이로소이다」

글 : 박정인(시인)

박종규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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