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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시놉시스

         푸른 시놉시스

                                                  남궁금순

 

여자가 밭에 나와 소설을 쓴다

 

사업한다 살림 다 날리고,

사십 대 중반 겨우 넘긴 어느 날 잠자다 심장마비로 가버렸다는 남자

기(起)다

 

기막혀 어린것들과 함께 죽자 했다

아이들 수달 같은 눈망울에 이슬

맺히는 걸 보니 차마 죽지 못했다

젊은 나이, 새사람 만나 보라는 은근한 권유에도

새끼들 눈에 밟혀 안 해 본 일 없이 살았다

승(承)이다

 

한창 불붙을 때 꺼져 검부잿불이 됐다는 여자

 

아들마저 망해 혼자 변두리로 흘러와 사글세 빌라에 사는,

전(轉)이다

 

갈피 못 잡다 남의 땅 빈자리 하나 얻어 심은 푸성귀 나풀대며 야시

랑거리는 재미, 고것들 자식들 손에 들려 보내주는 재미, 결(結)까지

마저 쓰느라 서러워할 틈이 없다는 여자

 

-허구한 날 왜 밭에 나와 삽질, 호미질 하느라 힘을 빼요?

-곰삭은 행간 엮느라

 

언젠가 두툼하게 엮을 거라는 소설 몇 쪽 분량

땡볕에 잘 키운 야들야들한 상추, 쑥갓

맛들은 문장에 호미로 김을 매는 오후가 펄펄 익는다

 

이랑과 고랑이 바르게 정돈되어 있는 푸른 원고지

 

땀 뻘뻘 집필에 열중한 그녀에게

얼마나 힘들었냐는 비료도 뿌려줄 겸 밭으로 나서는 길

다음 쪽을 넘겨주는 바람, 시원하다

 

[김포문학 36호 (2019년), 106~107쪽 (김포문학 신인상 당선작)]

 

[작가소개]

남궁금순 김포문학 신인상(2019)으로 등단. 김포문인협회 회원. 체신청 주관 경인 지역

가족글짓기대회 은상(1995), 제14회 김포시 여성주간 기념 글짓기대회 최우수상

(2013), 김포여성 기예경진대회 우수상(2014), 제4회 산림청 주최 무궁화

문학상 동상(2015), 제39회 샘터상 생활수기 가작 수상(2018)

 

[시향]

 남궁금순 시인의 이 시는 불운했던 한 여자의 삶을 한 편의 서사물처럼 잘 갈무리 한 시다 사십 대 중반을 겨우 넘긴 남편이 심장마비로 가고, 한창 불붙을 때 꺼져 검부잿불이 된 삼인칭화자가 이 서사시의 주인공이다 여기서 여자가 쓰는 인생소설의 시놉시스는, 살아온 서사이기에 이미 구체화되어 있다 주변으로부터의 재혼 권유도 어린 것들 눈에 밟혀, 안 해본 일 없이 살았다 힘들게 키운 아들마저 망하고 여자는 변두리로 내몰려 사글세 빌라에 산다 겨우 남의 땅 한 자락 얻어 푸성귀를 가꾼다 자식들 찾아올 때 손에 들려 보내는 재미를 맛보는 것이 그녀 소설의 결(結)이다 땡볕에 나가 매일 밭일을 하는 것은 여자의 서사 속에 갈마들 곰삭은 행간을 엮는 일이다 허구한 날 밭에 나와 삽질 호미질 하는 오후는 뜨겁지만 그럴수록 그녀 소설은 클라이막스를 지나 안주의 삶으로 향한다 이랑과 고랑이 잘 다듬어진 싯푸른 원고지에 여자는 오늘도 땀을 쏟으며 집필에 열중이다 열중하면 할수록 싱싱한 상추, 쑥갓은 풍성해진다 푸성귀가 자라 아낌없이 베풀 수 있고 사랑을 표현할 수 있기를 결(結)로 삼고 있으니 이만하면 여자의 서사는 해피엔딩이다 그녀의 늘그막 삶 또한 시원한 오후의 바람과 함께 독자에게 희망을 준다

글 : 박정인(시인)

남궁금순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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