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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흉내

                             당신의 흉내

                                                                        안기필

 

가난을 업고 살았던 60년 잠깐의 여름날에 대나무 소쿠리에 쉰내나는 꽁보리밥을 씻어 찬물에 헹구어 몰래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난의 세월 지났어도 쌀 한 톨 남기지 않고 싹싹 비우며 밥을 남기면 죄로 간다고 습관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줄만 알았습니다. 당신 말대로 고운 하늘빛으로 비추어 이 땅의 순박한 농부의 수고로운 금쌀을 절대로 남기면 안 되는 줄 알았습니다.

허기진 시간을 위안 삼아 마지막 쌀 한 톨을 남기지 않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당신의 쪼잔한 마음 허투루 듣지 않고 지금 아이들에게 그대로 흉내를 냅니다.

넉넉한 마음 가질 새 없이 밥상머리에서 촉촉이 젖은 잔소리를 똑같이 합니다.

황량한 가을 들판에 버려져 짓밟힌  벼 이삭들의 구차하고 초라한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배부른 이 가을에 당신의 게걸스러운 흉내를 내며 익어가고 있습니다.

 

(김포문학 36호(2019년), 194쪽)

 

[작가소개]

안기필 전북 김제 출생, 군산대학교 행정학 석사. 창작산맥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김포문인협회 이사, <시쓰는 사람들> 동인. 제21회 김포시민독서감상문 공모 심사위원. 2020년 KBS 국악한마당 설 특집 전국민요대회 최우수상 수상(판소리 북병창). 공저『골드라인 먼 곳을 당기다』『바람의 모서리를 돌아서면』『시인은 시를 쓴다』『물 위에 사막이 있었네』등 다수

 

[시향]

24절기 중 아홉 번째인 망종(芒種 : 6월 6일 무렵)이면 보리를 수확하고 모내기하기에 적합한 시기이다 60년 전 여름이면 뒤주의 쌀도 거의 떨어지고 보리밥으로 연명하던 가정이 많았다 시인은, 대나무 소쿠리에 퍼 둔 쉰내 나는 꽁보리밥을 물에 헹궈 몰래 먹던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가난의 세월이 지났어도, 쌀 한 톨이라도 버리면 죄가 된다고 이르시던 당신의 말씀을 오늘날 시인은 자식들에게 똑 같이 흉내 낸다 지금 세대들이 이런 말에 귀기우릴 리 없겠지만, 귀찮아하며 들어두었다가 행여 닥칠지 모를 재난으로 인해 불가항력적인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면, 자식들도 아버지의 이 훈시를 똑같이 흉내 낼지도 모를 일이다 유효기간이 단 하루만 지나도 펄쩍 뛰며 내다 버리는 요즘 세대들에겐 당장은 이해할 수 없는 ‘당신의 흉내’겠지만, 유비무환의 자세로 머릿속에 탑재해 두어봄직하다 이러한 정신이야말로 우리의 뿌리이고 삭제할 수 없는 민족정서다 역사적으로도 부유하던 나라가 망해버린 경우가 많은 탓이다  

글 : 박정인(시인)

 

안기필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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