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시가 있는 공간
풀물이 드는 오후

        풀물이 드는 오후

 

                                               우남정

 

발동기가 괴성을 지르고 있다

공원 구석구석 풀숲을 헤집고 있는

노란 작업복 사내의 등에서 파란 점액질이 출렁거린다

 

이름을 물어보고 근황을 챙길 겨를도 없다

씨앗을 맺은 꽃대가 쓰러지고

넌출 밑동이 잘려나가고

풀보라 비릿하게, 허공에

풀물이 든다

 

모자 깊이 눌러쓰고 얼굴을 가린 채

종종 멈춰 서서 범벅이 된 풀 조각 털어내며

심호흡을 하고 있는 사내에게서 절삭유 냄새가 진동한다

 

뜨거운 단말마 속으로 기울어지는 해

죽음이 향긋하지 않느냐고

차라리 달짝지근하지 않느냐고

벌겋게 핏물 밴 서녘을 꿀꺽 삼킨다

 

초록은 잠시 잘려 나간 발등을 바라본다

 

처서에 들러붙은

그것들,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풀 풀 풀

 

담배를 빼어 문 사내의 손끝이 떨리고 있다

 

(우남정 시집,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녁이 오고 있다』문학의 전당, 2020)

 

[작가소개]

우남정  충남 서천 출생. 경희사이버대학 문예창작학과 졸업, 세계일보 신춘문예당선(2018),『다시올 文學』으로 등단(2008), 제16회 김포문학상 대상 수상(2017). 시집『구겨진 것은 공간을 품는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녁이 오고 있다』

 

[시향]

  허공에 풀물이 드는 오후의 풍경 속에, 사내가 예초기(刈草機)를 메고 공원 풀을 깎고 있다 발동기 동력에 사정없이 돌아가는 예초기 날은 촌음의 여유도 가질 수가 없다 풀들의 ‘이름을 물어보고 근황을 챙길 겨를도 없다/ 씨앗을 맺은 꽃대가 쓰러지고/ 넌출 밑동이 잘려 나가고/ 풀 보라 비릿하게, 허공에/ 풀물이 든다’라고, 시인은 풀이 잘려 나가는 급박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뜨거운 단말마 속으로 기울어지는 해/ 죽음이 향긋하지 않느냐고/ 차라리 달짝지근하지 않느냐고/ 벌겋게 핏물 밴 서녘을 꿀꺽 삼킨다 ”

 시인은 해가 지는 풍경을 일컬어 ‘해가 핏물 밴 서녘을 꿀꺽 삼킨다’고 한다 절묘한 표현이다 잘린 풀의 고통을 가늠하는 우리는 이 장면에 금방 빠져들게 된다 잘리는 풀 조각들이 ‘풀 보라’가 되어 허공을 물들일 때, 지는 해가 벌겋게 핏물 밴 서녘을 꿀꺽 삼켰다 풀물이 든 허공, 초록은 잠시 잘려나간 발등을 바라보고 있고, 털어내도 떨어지지 않는 풀 조각에 뒤덮인 채, 담배를 빼어 든 사내의 손끝이 떨린다 사내의 수고를 외면할 수 있다면, 풀 더미를 베고 누워 질릴 때가지 풀냄새를 삼키고 싶은 저물녘 풍경이다

글 : 박정인(시인)

우남정  mr@gimpo.com

<저작권자 © 미래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우남정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