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속에 저장되어 있는지도 모르던 일들이 꺼내려고 하니 어디서 하나 둘 떠오르는 것을 보니 참으로 사람이 신기하기만 하다. 여고시절에 자신의 아내가 아프다며 학생들을 여섯명씩이나 불러다 자신의 집청소는 물론 요강까지 닦게 했던 아무개선생님을 이야기할 때는 어제일 처럼 화가 나기도 하고 자신의 화를 참지 못하면 여고생들의 뺨을 사정없이 때리고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게 했던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비롯해서 그때의 편하지 못했던 기억들은 지금도 이야기하면서 그때 그시절로 돌아간듯이 아픔을 느꼈다.

상대방보다 힘이 약하다고 생각해서 정의롭게 말하지 못했던 마음이 그대로 불편한 심기가 되어 다시 살아나오고 있음을 보면서 스스로 놀랐다. 어디에 그와같이  다 사라졌던 것 같은 과거들이 숨어 있다가  걸어나오는 걸까? 그렇게 화가 나 있었던 일들은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 살아나왔다.

속상했던 일도 아팠던 일도 접었던 책갈피를 펴듯이 그대로 펼쳐졌다.  
좋았던 기억들도 많다. 여름방학에 찾아갔던 산골에서의 봉사활동과 모처럼 찾아온 꽃띠 여고생들의 화사함을 보면서 마음설레하던 총각들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같이 웃었다.
기억들을 나쁘게 저장하면 안된다는 것, 그렇게 많은 기억창고가 우리들의 깊은 곳까지 들어있는지도 새롭게 알았다.

쓰레기 같은 기억들은 다시 찾아서 닦고 청소하고 가볍게 해야함을 깨달았다.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시간이 가면갈수록, 자꾸만 고향과, 옛기억속의 옛사람 좋은 사람들이 보고 싶어지는 것은 무엇일까? 일정정도 교육을 통해 입었던 가치관이나 의도적인 생각들과 만남들은 시간이 가면 어느듯 껍데기가 되는 모양이다.

그리고 물 흐르듯이 자연스런 삶과 사람으로 살고 싶어하는 것이 자연스런 사람살이라서 그럴까?  그 친구만 해도 그랬다. 이제는 입맛만 해도 설탕같은 단 맛이 싫단다. 쓴 맛이 그냥 쓴 맛이 아니고 음미가 가능한 맛인줄도 알겠단다. 산길을 걸으며 친구와 민듥레 꽃과 왕고들빼기 잎새를 같이 씹어보았다. 민들레 꽃을 먹으며 쓴 맛을 먼저 느끼고 나면 단 맛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믿는 사람이 먹어서 그런지 아무런 의심도 없이 먹게 된다"고 친구가 말하면서 웃었다.

"믿는 사람이 하는 말은 팥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믿음이 가는 것을 어떡하냐!"

말이 옳아서라기 보다 믿는 마음이 커서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받아들이는 것 아닐까?
친구의 남편은 아내에게 잔소리를 하는 대신 좋은 책들이 그녀에게 잔소리를 하게 한단다.
이래라 저래라고 책이 잔소리를 하면 잘 듣지만 남편이 자신이 하면 잘 안듣는 것을 알면서 부터 채택한 아내 조종하기 방법이라나!     

친구는 무던히도 나를 찾았다고 했다.
한국에 있을 때도 너무나 보고싶어 남편과 강화도로 이사간다는 소식을 알고 무던히 찾아다녔는데 만날 수가 없었단다. 더구나 내 이름이 남자이름 같은지라 남편이 말하길 혹시 남자친구 아니었느냐고 묻고는 같이 찾다가 포기를 못하는 아내에게 짜증도 냈었단다.

인터넷이 그리 좋은 줄 실감했단다.
한국에 사는 한 목사님을 통해 찾아 달라는 부탁을 했더니 금방 찾아내더라나.

친구는 나를 보고 많이 울었다.
같이 목욕을 하며 한 쪽 유방이 없는 곳도 만져보고 깊은 상처를 만져보면서 내 맘처럼 아파했다. 잠시 내곁에서 머무는 동안 어린아이 보살피듯 나를 어루만지며 사랑스러워했다.
친구가 와 있는동안 남편은 따로자고 난 그렇게 좋아하는 친구와 안고 한 자리에서 잠을 잤다.

친구는 자다가도 내가 꿈질하면 다시 깨서 나를 만지고는 했다. 25년이 넘은 그 많은 세월을 지나 어제 만나고 오늘 또 만나는 것처럼 친구는 그렇게 내게 스며들었다.

정말 좋은 사람과의 만남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힘들지도 않고 꾸미지 않아도 저절로 감동한다. 나도 그친구도 사랑이 저절로 전해져 수도 없이 끌어 안았다.

대체로 그 친구는 나와 있었던 기억들을 대체적으로 다 기억하고 꺼내는 편이고 나는 그 이야기를 처음 듣는듯이  새삼스러워하다가 기억 저편에서  그 기억들을 찾아내는 편이었다.

내 기억속에 친구는 일찍 어머니와아버지가 다 돌아가셨고 가녀리고 수선화같은 모습으로 각인되어있는 친구였다. 그 큰 눈에 작고도 작은 얼굴 한 줌 밖에 안되는 가녀린 몸이 연민스러운 모습으로 기억난다.

중요한 것은 나를 처음 교회로 데려갔고 그 이후 나는 소위 팔자가 바뀌었다. 반장이었던 나를 도와 환경미화를 그렇게 잘 도와주었던 친구가 고맙고 미안해서 품앗이 하는 마음으로 따라나간 교회였는데  그 이후 목사가 되는 길을 걷다가 이제 '목사와 사는 사람'이 되었다.  

인생을 바꾸게 하는 사람이 꼭 유명한 사람일 수는 없다.
그러나 옆에 있으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은 간혹 다른사람의 인생을 풍성하게 하고 그 인생을 새로운 길로 인도하는 안내자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수선화를 닮았던 그 친구는 나의 안내자였다.
산길을 걸으며 내손을 잡고 친구가 말했다.

"그래서 지금 살고 있는 거 후회하니?"

"아니, 죽지만 않는다면 지금 이대로 아주 행복해. 사실, 살아있으면 다 부자야!"

친구도 나도 이제는 그 말을 알 나이가 되어가는 것 아닐까! 
 

유인봉  admin@gimponuri.com

<저작권자 © 미래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