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천사 십층석탑

이 탑은 1348년 고려 충목왕 때 개성 인근의 개풍군 광덕면 경천사에 세워진 이후에 겪은 사연이 남다르다. 비록 사람처럼 발(足)은 없어도 발이 있는 사람보다 먼 시간을 여행하고 돌아온 탑에서 지난 역사의 아픔을 묻어나게 한다.

1906년 겨울, 다나카라는 일본인에 의해 무단으로 분해되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18년 조선총독부의 반환 요청으로 도쿄에서 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탑은 탑이 아니었다. 상처를 입고 회복하기 조차 어려운 상태에서 경복궁에 방치되었다가, 1960년에 복원된 이후에도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근 100여년 만에 여행 아닌 여행 끝에 박물관에서 전시품으로 자리를 찾게 되었다. 

고려시대 권세를 누린 고용봉의 시주와 발원으로 건립된 탑이 우역곡절을 겪을 줄은 예상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공을 들여 만들어 놓은 탑에서 당시 개성 시민들은 소원을 빌기도 하고 여름에는 긴 그림자가 그늘이 되어 동자(童子)들의 쉼터가 되었을 것이다.

탑이 빛을 만나면 그림자로 자신의 형체를 표현하고, 사람은 마음속의 그림자를 얼굴에 표현하여 자신을 알리고 있다. 그러나 탑과 사람이 존재하고 살아가는 동시대의 현상에 따라서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 시련의 그림자가 탑과 사람에게 함께 다가오는 것을 경천사 10층 석탑에서 엿 볼 수 있었다. 세월이 편안하면 탑의 그늘은 여유로운 쉼터가 되겠지만 전쟁과 나라 없는 시대의 탑은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시련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다.

산중에 고이 있을 탑이 사람 끌려가듯이 짐짝에 실려 이국땅으로 건너갔다 다시 돌아와, 제 모습을 잃고 방치되었던 역사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한 형태에서 사람과 동질의 삶을 만나게 된다.

10여년 전에 사업이 곤두박질을 치면서 그동안 일구어 놓았던 터전이 순식간에 무너진 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자살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그때 이해하게 되었단다. 모든 노력이 IMF라는 외부환경으로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어 희망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온몸에 서리고 있던 어두운 그림자 속에 묻혀 있는 형체에서 자신은 이미 죽음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단다.

그 친구를 지난 6월 3일 단오축제를 준비하던 조각공원에서 만났다. 그동안 뼈아픈 재기의 노력으로 다시 일어나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친구는, 죽음의 문턱에서 고민하던 그림자가  에너지가 넘치는 쉼터로 변화되었음을 여유로움이 있는 얼굴에서 읽게 되었다.

사전에서 그림자는 ‘물체가 빛을 가리어 반대쪽에 나타나는 거무스름한 형상“이나 ”얼굴에 나타나는 불행이나 근심 따위의 표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목표를 정하고 노력한 결과가 실패가 되고, 어떤 일에 대한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심적 고통은 허탈감이 짙게 베인 그림자가 된다.   .

특히 2006. 5. 31. 지방자치제 선거에 출마했던 후보자들 중에서 낙선한 사람들은 허탈감에서 잠을 설치고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일어서는 것이 사람이라지만 2등이 없는 치열한 선거에서 피를 말리는 하루하루를 생각하면 그 고통의 그림자는 쉽게 거두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삶에서 나타나는 다른 양상의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한때의 아픈 그림자가 다시 여유와 희망의 쉼터가 될 날이 있을 것이다. 작고 때로는 큰일에서 상처를 받고 실패를 겪은 후보자들과 사람들에게 고통의 그림자는 나중에 안식처가 되는 삶의 쉼터가 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자취가 될 수도 있다는 위로의 말을 전하며,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쉬어 가는 큰 산(山)의 큰 그늘로 거듭나기를 기원한다. 

형체도 없이 긴 그림자로 오랜 세월을 지내다 100년 만에야 국립박물관 실내에 서 있는 경천사 10층 석탑에서 그림자는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글을 쓰신 정현채님은 통진고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이며 김포통진두레놀이보존회 사무국장과 사단법인 전통문화예술연구소 기획이사로 활동중이다.

정현채  정현채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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