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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

                   무죄

                                 권혁남

뻔뻔스럽게 누워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사회복지사 대체근무 안내이다

기다리지는 않았다

목소리만으로는 나이를 짐작 못 하는 듯

독설처럼 나이를 묻는

수화기 저쪽 명랑한 표정이 사교적이었다

빌려온 마음같이 일상적이었다

 

한 계절 계약직 비상구로도 빠져나가지 못한

자꾸 침침해지는 시야들

조건 경력 따위들이 눈과 귀를 자극할 뿐이었다

쉽게 열리지 않는 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갈 수는 없는 일

외출을 경계하고 있는 그녀

한쪽 귀만 열어 놓은 채

무릎을 꼿꼿하게 세우고 유예되고 있는

그녀의 시간은

무죄

 

팔뚝 살 꼭 끼는 정장 외투를

가끔 입어보는 시간이나

거울을 볼 때마다 한 줄씩 자라고 있는 주름살

무뎌진 통증을 재활 치료하듯

경력 단절은 지속적인 한기로 오래된 통증이었다

저녁이 되면 숙면에 들지 못한 이력서는

귀퉁이가 조금씩 쪼그라들고

전등갓 속 말라버린

벌레들이 몇 마리일까가 더 궁금해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는 오래전 습관

나는 어둠에서 어둠으로 또다시 도망쳤다

모두 무죄

 

(달詩 시선 3, 『꽃을 매장하다』<사색의 정원>, 2021, 130~131쪽)

 

[작가소개]

월간 《시 see》추천시인상(2016) 등단, 김포문인협회 회원, 김포문학상

우수상(2011),헤이리여성백일장 가작(2012), 마로니에여성백일장 입선

(2016), <반딧불이> 동인, <달詩> 동인

 

[시향]

  사회복지사 대체근무 안내전화를 받은 시인은 전화를 ‘기다리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뻔뻔스럽게 누워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라고 말합니다 핸드폰을 뻔뻔스럽다고 말한 것은, 큰 기대는 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말로도 들립니다 경력 단절된 사람들이 문을 두드려도, 한 계절 계약직 비상구로도 빠져나가지 못한 상황입니다 “자꾸 침침해지는 시야들”은 “재취업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란 말의 다른 표현일 테지요 대체근무 안내전화에서도 조건 경력 나이까지 묻습니다 독설로 들립니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을 리가 없겠지요 그러나 외출을 경계하고 한쪽 귀만 열어 놓은 채 열리지 않는 문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유예되고 있는 시간은 ‘무죄‘ 지요.

계약직이든 정규직이든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팔뚝 살에 꼭 끼는 정장 외투를 입어보고, 거울을 볼 때마다 늘어나는 주름살에 마음의 통증을 느낍니다 써 둔 이력서는 귀퉁이가 말려지고, 전등갓 속 말라버린 벌레들 수를 궁금해 하며 천장만 바라보는 일이 오랜 습관이 되었습니다 이 또한 ‘모두 무죄’입니다

하루 빨리 코로나 19의 쓰나미가 진정되고, 포기하기 전에 경력단절과 재취업의 고리가 잘 순환되면 좋겠습니다

글 : 박정인(시인)

 

권혁남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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