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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바가지(수필)

                                       박 바가지(수필)  

                                                                                                      장정희 

시절을 다한 적황색 단풍이 어디쯤 제 갈 곳을 재는 늦가을 텃밭 가장자리 후미진 곳 튼실하게 영근 박 한통을 따가지고 돌아왔다.
  운전은 언제나 서툴어도 남편의 출근도우미가 된 나는 어느 날 교사담벼락에 붉은 작약이 함박웃음을 머금고 반겨주는 게 아닌가. 눈부시도록 고운 자태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런 바로 옆에 어디서 와서 움을 틔운 건지 박 싹이 엷은 바람에 나비의 날개처럼 나풀거리고 있었다. 며칠 새 넝쿨손을 뻗더니 무엇이든지 잡으려는 태세다. 담에 노끈으로 얼기설기 묶어 준다.
  여름 햇볕은 온종일 잎사귀를 방석삼아 떠날 줄 몰랐고 마디마디 동그란 꽃망울이 맺혔다. 얼핏 초가지붕위에 올라앉은 달덩이 같은 박 한통이 꿈속처럼 다가온다. 모든 것이 귀하던 시절 주방에는 밥그릇 몇 벌을 제외하면 턱없이 부족한 그릇을 충당하기 위해 박을 타 바가지를 만들어 사용했다. 어쩌다 깨지거나 금이 가면 어머니는 꿰매 쓰셨다.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는 전자제품과 주방용품들, 말 그대로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세상에 박 바가지는 본연의 자기를 잃어버리고 공예작품으로 새로 태어났지만 그래도 나는 올가을 햇살 풍성한 날 동그란 박을 타 우리 부부의 평생 사랑을 담아야겠다. (박 바가지 부분)
 
[작가프로필]
[수필과비평]으로 등단, 수필가, 수필과비평문학상, 김포예술인예총회장상 등을 수상했다. 수필집 [직선과 곡선] 등 여러 작품집이 있다. 한국문인협회회원, 김포문인협회회원.
 
[시향詩香]
수필을 좁은 지면에 상재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먼저 작가와 독자의 너른 혜량을 구한다. 박꽃, 달빛 내려앉은 초가지붕 목화솜을 뿌려놓은 듯 눈부신 요정들이 하늘하늘 속삭이는 동화 속 세상을 연상하게 한다. 청순한 꽃의 이미지는 큰누님 시집가던 날 단아한 면사포 같기도 하고, 요즘 사람들은 달덩이 같은 박의 쓰임을 모른다. 흥보전 대박 터지는 로또나 선악이라는 이분법으로 사람됨의 잣대를 해학적으로 풍자할 뿐이다. 작가는 풍족하지 못한 시절 박 바지가 얼마나 요긴하게 쓰였는가를 인자한 서술로 향수를 자극한다.  찰람찰람 물동이를 훔치기도 하고, 나물을 무치기도 하고, 고추장에 보리밥을 비벼먹기도 하고 깨지면 꿰매 쓰던 바가지, 질그릇에 보배를 담은 것처럼 복을 담아 쓴 그야말로 복 바가지다. 세태는 공예가의 손에서 예술이란 형태로 새 삶을 부여한다. 금년 정월 대보름에는 복조리도 조롱박도 한 쌍씩 사서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가득 담았으면 좋겠다. 너무 많이 담아 금이 갈지라도
글 : 송병호 [시인]

장정희 시인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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