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 상담 과정에 대한 공부를 위해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집을 떠났던 것이 내게는 이 가을의 한 행복이었다. 그런데 내가  돌아오자, 아이들을 보살펴왔던 남편이 “이제는 내  차례야, 나도 한번 이 가을 외박을 해 보아야겠어”라고 말했다. 그냥 하는  소리인줄 알았더니 등산화를 신고 주섬주섬 준비를 마친 후 나서는데 말릴 수가 없었다.

그가 다녀온 곳은 인가도 없고 한시간여를 걸어 들어가야 하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차도 다니지 않는 깊은 대관령 산골이었던 모양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벌써 6-7년째 기계나 다른 손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노동으로 땅을 일구고 곡식을 거두어들이며 자연과 거의 일체가 되어 수행하며 살고 있는 지인을 만나러 간 것이었다.

지금은 찾아볼래야 구경하기도 힘든 지게에 괭이등 농기구를 지고 걸어올라가야 했단다. 그런데 8천여평의 산골짜기를 한 뼘씩 밭으로 일구며 침묵수행을 하면서 살아오고 있다는 그 이를 대관령 아흔 아홉 고개 그 산골에서 만나고 오더니 남편이 그렇게 밝게 변해버렸다. 잘 먹고  잘 놀다 온 것이 아니라 아궁이에 불때고, 당귀를 심으려 괭이로 땅을 파다 온 것, 그리고 산 속 깊은 곳에서  두 사나이가 일하다 힘들면 밥지어 먹고  어두워지면 자고 또 일어나 일하다 온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사람이 변했다.

우선 그는 걷기를 싫어하는 편이어서 평상시에  걷자고 하면 아이 달래기보다 더  피로감을 주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웬걸 그곳에 다녀오더니 60대인 그이가 800미터 고지를 40대인 자신보다 훨씬 더 펄펄하게 잘 오르실뿐만 아니라 노동일도 자신은 택도 없더라며 부끄러워했다. 그 이후 아침부터 장릉을 한바퀴  도는데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덕분에 한참  아름다운 잎새들의 향연을 감탄하며 나란히 아침산책을 신나게 하고 있다.

그 뿐 만인가? 오자마자 집안구석구석의 쓰레기를 모두 치우지 않나, “이제 꼭 인생의 반을 산 셈이니 앞으로 살 계획을 다시 세우겠다. 5년 후에는 반드시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물처럼 바람처럼 살자”고 했다. 오랜만에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참 밝아서 좋고 밝은 신념에 차 있어 좋았다.

물론 나는 그가 믿는대로 경험할 것이라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현실의 모습은 아닌 것 같지만 평소 마음을 먹은 것, 혹은 신념이 형상화된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끔 내가 어찌어찌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빠지기가 쉽다. 솔직히 나 자신도 그런 적도 많고 그래서 이리저리 싫은 소리도 주고 받았지만 결코 만족할 만한 변화나 승리감을 맛볼 수는 없었다. 많은 이들이 아직도 아내 혹은 남편을 변화시키고 고쳐보려고 하거나 그럴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시간 낭비요, 서로에 대한  답도 없는 아픈 출혈일지도 모른다.

대신에 이 가을 홀로 떠나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어떨까?
짧은시간일지라도 정말 그런 일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변화란 자신이 변하기로 선택할 때만 가능한 것이 분명하다. 작게는 담배하나 끊는 일조차 남의 잔소리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런 변화가 일어나려면 반드시 어떤 변화의 계기나 기회가 있기마련이다.

가끔은 혼자 떠났다 돌아오는 순간 “인생이 아주 짧은 꿈결인 것”을 깊이  느끼고 삶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서려는 진지한 노력을 하게 되지 않을까?
‘떠나본다는 것’은 결코 사치가 아니다. 

시간이 없다고들 하지만 정말  순간에 인생이 끝날 수도  있는 것을 안다면 못 떠나보는 것이 욕심은 아닐까? 떠나 본사람만이 자신을 다시 볼 수 있다.
익숙했던 삶을 떠나 낯선 그 어디, 또  다른 삶을 보고 나면 인생을 알고 돌아가야 할 지점도 돌아서야 할 지점도 알게 되지는 않을까 한다.

유인봉  admin@gimponu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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