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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고 잉태하는 풍운의 땅 공주정현채의 문화읽기(14)

아산 맹사성 고택에서 나와 차령산맥 줄기의 광덕산에서 내려오는 개울물에서 물놀이 하는 사람들을 차창 밖으로 보면서 답사 일행은 천안공원(묘지)을 넘어 다음 답사지인 김옥균 생가 터를 향하여 차령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서울에서 천안을 지나 공주 가는 길목인 차령고개는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호남으로 넘어가는 가장 큰 고갯길로 알려져 있으며, 이몽룡이(춘향전) 과거에 급제하고 이 고갯길을 넘어 고개 아래에 있는 정안면에서 하루 밤을 머물고 남원으로 떠났다고 한다.

옛날부터 고개와 나루터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고 머무는 자리에는 이야기와 만남의 인연이 있다. 또한 물자가 교류되는 도착점과 시발점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 도령이 춘향이 만나는 꿈을 꾸며 하루 밤을 머물고 갖던 공주 정안면의 차령고개는 수십 년 동안 개발이 거듭되면서 이제는 산 중앙을 관통하는 터널이 개통되어 차량들은 고개를 넘어갈 필요가 없어지고  몇 분이면 정안면을 지나가는 길이 되었다.

차령터널을 지나면서 예전의 차령 휴게소에서 쉬고 가던 생각을 떠올리면서 김포를 생각하게 되었다. 김포는 김포대교와 일산대교. 초지대교와 강화대교가 있고 외곽순환도로와 더불어 앞으로 도시개발과 인구 증가를 예측으로 도시 계획을 수립하면서 다양한 다리와 도로가 건설될 것이다.

   
▲ 김옥균 유허비
각종 도로와 교량(다리)들은 김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편의성과 인근 도시와 연결을 목적으로 건설되겠지만 김포에 많은 사람들이 머물게 하는 기능이 될지 아니면 단지 지나가는 길이 될 것인지는 모른다.

이왕이면 김포에 사람들이 머물고 살아가는 풍성한 터전이 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도시 기반 시설과 자연환경이 먼저 조화롭게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진전 없는 답보 상태에서 통일이 되어 열리기만 바라는 김포의 보배로운 길인 김포의 강(江)과 나루터를 찾아 강은 잇되 강이 없고 나루터는 잇되 나루터가 없는 현실에서 흙길과 물길이 함께 열리어 소통과 유통의 막힘없는 김포가 되도록 지금부터라도 토대를 만들고 노력해야 함을 절실하게 생각한다.

반쪽짜리 소통의 길 金浦
차령고개를 넘어 정안면 광정리에 있는 김옥균(1851~1894) 생가 터에 도착했다.
옛날에는 풍경 좋은 곳이었을 이곳도 도(국도)로 건설로 산속마을에서 도로변의 마을로 변화 되었고 생가 터 입구까지 아스팔트로 새 단장을 하고 있었다.

감나무가 많아서 감 고을이라 불렸던 이곳에서 선생은 6세까지 살다가 유년기부터는 한양에서 성장하고 11세 때인 1816년부터 16세까지 서당에서 율곡의 학풍을 받으면서 공부 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1884년 갑신정변을 단행하여 개화당의 신정부를 수립하고 개혁을 진행하다 청군의 무력개입으로 개화당의 집권은 삼일천하로 끝이 나고, 타국에서 후일의 재기를 기약하였으나 1884년 자객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바람과 구름 같이 살다가는 풍운의 삶, 개혁을 실천하다 결국은 삼일천하에서 밀려나야 하는 현실과 이국땅에서 반대세력의 칼날아래 쓰러져 가야 하는 비운의 피바람은 김옥균 선생이 암살당한 십년 후 선생이 태어난 공주 우금치에서 산하를 피로 물들이는 동학혁명군과 일본군과 조선관군과의 전투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누가 예상 했을까?

청군의 무력개입으로 선생의 개혁실천이 좌절되고 십년 후 일본군의 개입으로 동학혁명군의 실천계획이 좌절된 공주는 한때 개혁과 혁명의 꿈을 잉태하던 땅이요 풍운의 땅이었다.  

김옥균(1851~1894)

   
▲ 고균 김옥균
본관 안동(安東). 자 백온(伯溫). 호 고균(古筠) ·고우(古愚). 시호 충달(忠達).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주도하였다. 6세 때 김병기(金炳基)의 양자로 들어가 1872년(고종 9)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교리(校理) ·정언(正言) 등을 역임하면서 관료로서 출세의 길이 열렸다. 그러나 박규수(朴珪壽) ·유대치(劉大致) ·오경석(吳慶錫) 등의 영향으로 개화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며, 특히 1881년(고종 18)에 일본을 시찰하고, 다음해 다시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 일행의 고문으로 일본을 다녀온 후에는 일본의 힘을 빌려 국가제도의 개혁을 꾀할 결심을 굳혔다.

서재필(徐載弼) 등 청년들을 일본에 유학시키고, 박영효 ·서광범(徐光範) ·홍영식(洪英植)과 함께 국가의 개혁방안을 토론하다가, 1884년(고종 21)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부측에 군인양성을 위한 300만 원의 차관을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당시 청나라 세력을 배경으로 하는 민씨(閔氏) 일파의 세도정치가 지나치게 수구적(守舊的)인 데 불만을 품고 국제정세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개혁을 단행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수구파의 제거가 불가피하다고 보고, 신축한 우정국(郵政局) 청사의 낙성연을 계기로 거사를 감행하여 한규직(韓圭稷) 등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변을 일으켰다. 이튿날 조직된 새 내각의 호조참판으로 국가재정의 실권을 잡았으나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자 일본으로 망명, 10년간 일본 각지를 방랑한 후 1894년(고종 31)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가 자객 홍종우(洪鍾宇)에게 살해되었다.

갑신정변은 민중이 직접 일으킨 것이 아닌 소수의 지성인들의 거사였다는 점에서 임오군란(壬午軍亂)과 구분되고,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항거가 아닌 기층질서에 대한 개혁의지였다는 점에서 동학농민운동과도 구분된다. 또 왕조의 제도적 개혁을 뛰어넘어 왕조질서 그 자체의 변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갑오개혁(甲午改革)과도 구분된다.

갑신정변에 투영된 김옥균의 사상 속에는 문벌의 폐지, 인민평등 등 근대사상을 기초로 하여 낡은 왕정사(王政史) 그 자체에 어떤 궁극적 해답을 주려는 혁명적 의도가 들어 있었다. 1895년(고종 32)에 법부대신 서광범(徐光範)과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의 상소로 반역죄가 용서되고, 1910년(융희 4)에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기화근사(箕和近事)》 《치도약론(治道略論)》 《갑신일록(甲申日錄: 手記)》 등이 있다.  출처 네이버

 

정현채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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