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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둥지한익수 RBPS경영연구소 소장
   
▲ 한익수 RBPS경영연구소 소장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근무지를 따라 이사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경우는 결혼 초기부터 회사 일로 국내외 출장이 잦아 집을 비워야 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항상 아내는 이를 아쉬워했다. 그러던 중 1997년 대우자동차가 세계경영의 일환으로 우크라이나에 합작공장을 세우게 되면서 그곳으로 발령이 났다. 

아내는 무척 좋아했다. 외국에서 가족과 함께 살아본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가 먼저 현지에 도착해 보니 이사하기가 어려운 환경이었다. 근무지가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예프에서 기차로 15시간 정도 가야 하는 자포로지라는 지방 도시에 있어, 자녀교육이 문제가 되었다. 아내는 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의 교육을 고려해서 키예프로 이사를 했다.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추운 겨울, 영어조차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서 혼자 아이들과 정착하기까지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시 주재원들은 대부분 처음에는 단신으로 부임해서 주말도 없이 신차 생산을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한동안은 가족 방문도 통제되었다. 

구 소련으로부터 독립 된지 얼마 안되어 치안 상태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운동화를 하나 사려고 시장(바그잘)에 갔다. 이상하게도 운동화를 한 짝씩만 놓고 파는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도난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시내에 차를 몰고 나갔다가 교통경찰에게 잡혀 범칙금을 냈다. 

돌아오는 길에 같은 장소에서 다시 걸렸다. 신호 위반을 했다는 것이다. 말이 안 통하니 위반을 하지 않았다고 설명할 도리도 없다. 그곳 상사 직원에게 물어보았더니 이곳에서는 교통경찰은 급여가 따로 없고, 범칙금을 받아 생계를 유지한다고 한다.

그러니 외국인은 그들의 밥이다. 어느 날 아침, 한 직원이 조깅하러 나갔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맨발로 들어왔다. 명품 운동화를 뺏으려고 누군가가 폭행을 한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가족도 없이 추위보다 더 혹독한 한 겨울을 보냈다. 

우크라이나에도 봄이 왔다. 아지랑이 아른거리는 드니프로 강 주변의 봄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추위가 풀리면서 가족 방문도 허용되었다. 자포로지로 이사 오는 가정이 하나 둘 늘기 시작했다. 아내도 키예프로 이사 온 지 6개월 만에 처음 자포로지를 방문했다. 

기차 역에 배웅하러 나갔다. 기차가 도착하자 경쾌한 팡파르가 울려 퍼진다. 많은 사람들이 꽃을 들고 나와 손님을 맞이한다. 뜨거운 포옹을 하는 젊은이들로 붐빈다.

이곳 사람들은 힘겨운 생활환경 속에서도 꽃을 좋아하고, 춤과 음악을 사랑하는 낭만적인 민족이다. 아내와 함께한 자포로지의 일주일은 하루 같았다. 

아내가 떠난 뒤 노트 한 권을 발견했다. 오랜만에 남편을 만난 기쁨과 다시 헤어져야 하는 아쉬운 심정을 삽화와 함께 일기처럼 써 놓은 글들이다.        

“석류 알처럼 붉은 노을이 저녁 하늘 머 얼리 팔 벌리고 서있네. 
누가 와서 안길까 봐 구름 뒤에 숨었네. 

끝없이 넓은 드니프로 강물 위에 그림자 되어 그대는 영영 돌아오지 않는 강물을 잡을 수는 없을까. 홍보석처럼 붉어진 강물 위에 내 사랑 가지런히 담그고 싶어라. 연지 곤지 찍은 새색시 수줍음처럼, 다소곳이 절하듯 강물 뒤에 숨어 버리네. 

쉬엄쉬엄 놀다 나 가지 왜 그리 성급한 고. 님 그리며 애타게 기다리다가 이내 마음 방황하다 지쳐버린 아쉬운 마음. 가야 하네 가야 하네 발길 무거워 세심정에 홀로 앉아 노을 보다가 

어느새 내 마음 노을 따라 간다네. 못내 아쉬운 마음 남긴 채 떠나간다네.”
그로부터 3년 후 그 어려웠던 환경을 극복하고 가족들과 정착할 만 하니까, IMF로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우리 주재원들은 정든 우크라이나를 떠나와야 했다. 

가족의 소중함을 우리에게 가르쳐준 정든 자포로지를 뒤로 한 체. 가족은 함께 있으면 가끔 서로의 소중함을 잊고 살지만, 떨어져 있으면 한없이 그리운 둥지이다. 가족은 함께 사는 것만으로도 큰 축복이다.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다. 

 

한익수 소장  mr@gimp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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